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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16. 16世 〉8. <부정공>학생공휘신명가장(學生公諱新命家狀)
1. 문헌 목록 〉16. 16世 〉10. <부정공>영귀정서실영건권선문(詠歸亭書室營建勸善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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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부정공>영귀당공휘태망묘표(詠歸堂公諱泰望墓表)
詠歸堂公諱泰望墓表 有以魁偉之材未能一試於世優遊水竹間以終其身者曰趙公泰望字渭叟廣顙疎眉儀觀俊麗心事白直愛好人倫風流弘長群居諧笑意氣籠盖一座見人不韙處輒正言折責不少饒假人苟有善若己有之必傾心稱道盖其資質樸實菀有古人風自幼行誼由性事生養母極其孝旣早孤事死如事生平日愛敬之心克致乎哀慕哭泣之節饋奠之禮一遵儀文而不懈値喪餘之日悲號如袒括之時老而荕力甚衰遠近祀未嘗不躬自薦獻雖代遠闕享者亦置田不贊香火先世妥靈之事必出力相之居家有法度造端乎夫婦內外相拜如賓其燕私之間律身甚嚴梱以內肅然整理常喜看禮書節文多誦習必幅巾深衣拜廟而行祀敎子而義方擇師以訓督之至宗族鄕隣曲盡其恩義睦婣任恤人無不感服遇事辦治綽有餘裕不肯以章句小儒自命留心事功以爲有用苟使見用也必有所展布而公不應擧覔官竟泯泯不顯豈不深可惜也公淳昌人高麗檢校大將軍諱璋其爲鼻祖也三傳而有諱元吉封玉川府院君四傳而有諱瑜爲副正副正公以學行忠孝旌閭建院其爲十一代祖也自是而又幾傳而有諱時聖諱維綱諱之珣即公之曾祖及祖與考也諱之藩乃公之伯父而取公子之所後考也廣州李氏可果章遠之女即公所生母而昌寧曺氏參奉曏女即公之所後妣也生於我 顯廟五年甲辰十二月二日歿于我 英宗己未六月十五日以是年十月十二日葬于順天府雙巖面竹林洞乾坐原配孺人文化柳氏景昌之女柔順賢淑恪謹婦道先公一年而戊午十月二十四日歿移厝合祔焉公有五男一女男崇夏峻夏載夏熙夏光夏女適濟州梁濟夏崇夏生員峻夏出爲三寸重望後孫男女並爲若干人噫嘻記昔余之訪公於詠歸堂也庭梅吐花山鳥嚶鳴婆娑汀渚酣戱笑傲雖落在遐陬意尙超然公眞安而自適者歟公之歿後三年辛酉進士君謂余同宗而知公最深懇懇以墓文爲請余不忍辭略識始終如右云 宗黨 翊臣 撰 假監役道淡 영귀당공휘태망묘표(詠歸堂公諱泰望墓表) 괴걸(魁傑)하고 웅위(雄偉)한 자질을 가지고도 능히 세상을 위해 한번도 시험해보지 못하고 수죽(水竹)간에 노닐며 일생을 마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조공태망(趙公泰望)으로 자는 위수(渭叟)다. 이마가 크고 눈썹이 성글며, 용모가 준수하고 심사(心事)가 강직하여 인륜을 애호(愛好)하며 풍류(風流)가 홍장(弘長)하여 여러 사람이 모여 화락하게 담소할 때는 그 의기가 좌중을 앞도하였고 옳지 못한 것을 대하면 곧 바른 말로 절책(折責)하여 조금도 용대(容貸)치 아니하였으며, 지극히 착한 행실을 보게되면 마치 자기일같이 마음을 기울여 기뻐하며 칭도(稱道)하였으니, 대개 그 자질(資質)이 순박(淳朴)하여 울연(菀然)히 고인(古人)의 풍채가 있었던 때문이리라. 어려서부터 행의가 천성에 따라 순독하여 효도로써 생양모(生養母)를 섬기고 이미 일찍 아버지가 별세하였으므로 고자(孤子)가 되어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 섬기듯 하였으니 평소에 사랑하고 공경한 마음이 능히 슬피 추모한 지성으로 나타나 곡읍(哭泣)한 절차와 제전(祭奠)의 예를 한결같이 예문에 따라 게을리 아니하였다. 탈상(脱喪)후에도 슬피 곡읍하기를 상시(喪時)같이 하였으며, 늙어 근력이 심히 쇠약하여도 원근(遠近)제사에 일찍 몸소 참석하지 아니함이 없고, 비록 원대(遠代)라도 궐향(闕享)한 선영이 있으면 제 위토를 사서 향화(香火)를 잇게 하며, 선대의 혼령을 편안히 할 일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헌성(獻誠)하고 거가(居家)에 법도가 있어 예절을 부부로부터 비롯하여 내외가 서로 손님같이 대하며, 그 연한(燕閒)한 때에도 몸을 더욱 엄하게 다스리니 가정이 숙연하게 정리되었다. 항상 예서절문(禮書節文)보기를 좋아하여 많이 송습발췌(誦習拔萃)하고 반드시 복건심의(幅巾深衣)로 사당에 참알하여 향사하고, 자제를 의리로써 교훈하고 스승을 가려 훈도(訓導)하며 종족향린(宗族鄕隣)에 대하여 성심으로 은의(恩義)를 다하고 외척간에 친목을 다하며 사람을 위하여 힘을 다하고, 곤궁한 자를 구휼하니 감복 아니한 사람이 없었다. 일을 처리할 때에 관홍(寬洪)한 도량이 있어 글귀나 짓는 작은 선비로 자처하지 않고 국사에 공헌(貢獻)할 마음을 가졌었다. 실지로 크게 기용 되었더라면 그 위대한 포부를 전시(展施)했을 텐데 공이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임천(林泉)에 묻혀 현양(顯揚)을 멀리하고 말았으니 어찌 깊이 애석치 않겠는가. 공은 순창인으로 삼탄공휘대춘(三灘公大春)의 六세 손이시다. 三전하여 휘 시성(時聖) 휘 유강(維綱), 휘 지순(之珣)은 공의 증조 및 조·고(祖考)요, 휘 지번(之藩)은 공의 백부로 곧 양부이며 광주이씨 사과장원의 녀(廣州李氏可果章遠之女)는 공의 소생 비(妣)요, 창녕조씨참봉향지녀(昌寧曺氏參奉曏女)는 공의 소후 비(妣)였다. 一六六四년 현종 갑진 十二월 二일에 출생하고 영종(英宗:一七三九) 기미년 六월 十五일에 별세하여 그 해 十월 十二일에 순천부 쌍암면 죽림동 건좌원(順天府雙巖面竹林洞乾坐原)에 안장하였다. 배는 유인 문화유씨 경창의 녀(孺人文化柳氏景昌之女)로 유순 현숙하여 부도가 순비하였는데 공보다 一년 먼저 무오년 十월 二十三일에 별세하야 이조합부(移厝合祔)하였다. 자녀는 五남一녀로 남(男)은 숭하(崇夏)·준하(峻夏)·재하(載夏)·희하(熙夏)·광하(光夏)요, 녀는 제주 양제하(濟州梁濟夏) 처였으며, 숭하는 생원이며, 준하는 숙부(叔父) 중망(重望)의 후사로 출계하고 손 남녀 약간이 있었다. 아! 옛날 내가 공을 영귀당(詠歸堂)으로 심방하였을 때 뜰 가득히 매화 향기를 풍기고(庭梅吐花) 산 새는 서로 우는데(山烏嚶鳴) 공이 강가를 거닐며 춘광을 감상하고 마음 가득히 즐거움을 음미하고 있었다. 비록 한적한 시골에 살지만 지취(志趣)가 초연(超然)한 것을 보면 공은 참으로 안이자적(安而自適)할 줄 아는 처사(處士)였다. 공이 별세후 三년 신유(辛酉)에 진사군(進士君)이 찾아와 동종(同宗)으로서 가장 공을 깊이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하면서 간곡하게 묘문(墓文)을 청하므로 차마 사양치 못하고 대략 시종(始終)을 위와 같이 기록한다. 종당(宗黨) 익신(翊臣)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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